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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25.11.06) [증도가자 문화재 지정] ③ 증도가자 놓고 이해관계·권력간 교차…문화재 지정 걸림돌 걷어내야(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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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20
  • 작성일25-11-0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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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쇄문화사에서 한국 위상 새롭게 조명할 기회

문화계 권력 싸움에 '과학적 검증' 결과 가려저서야

재조사·검증 거쳐 증도가자 인정 받도록 해야

 

증도가자 활자 모습사진한국고미술협회
증도가자 활자 모습[사진=한국고미술협회]


[이코노믹데일리] 지난 2010년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 고려시대 금속활자 증도가자(證道歌字)는 세계 금속활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수십 년간 문화재 지정이 지연돼왔다. 

증도가자가 고려 고종 26년(1239)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인쇄본에 사용된 활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세계 인쇄문화사에서 한국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할 기회를 맞았으나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 이해관계, 제도적 허점은 증도가자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2025년 국정감사를 계기로 국가유산청은 재심의를 예고하며, 증도가자는 다시 한번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로 인정받을 기회를 맞았다.

◆과거 문화재위원회 부결 결정의 부당성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2017년 4월 13일 당시 문화재위원회(동산분과)에서 고려금속활자(‘증도가자’) 101점의 보물 지정 안건을 심의·부결했다. 그러나 올해 9월 작성된 감사원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위원회가 통계 분석 오류, 일부 조사 결과 누락 등의 문제로 잘못된 부결 결정을 내렸다. 또한 위원회가 출처를 문제 삼은 의견도 결점이 있다고 밝혔다.

감사원 보고서는 당시 위원회가 활각본과 번각본의 크기 차이를 문제 삼아 문화재 지정신청 활자(증도가자)로 “증도가를 인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조판 실험 결과는 “증도가 인출이 가능했다”였다고 통계 분석에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증도가자의 출처와 관련해 “해당 활자는 발굴 유물이 아닌 전래 유물이어서 여타 보물로 지정된 전래 유물과 마찬가지로 최초 발굴 장소, 초기 소장자 등이 불분명한 것은 당연한데 이에 대한 고려 없이 발굴 장소와 시기 등이 불명확하단 사유로 ‘소장 경위 불분명’이라고 결정한 것은 무리가 있다”고 위원회 측의 잘못을 지목했다. 

‘출처’는 당시 증도가자의 문화재 지정 부결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된 부분이었다.

증도가자를 국내에 처음 공개한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활자 조판 실험 결과와 연대 측정 자료가 있었음에도, 위원회는 일부 데이터 누락과 비과학적 의문 제기를 근거로 부결했다”며 “이는 제도적 허점과 내부 판단 미비가 결합된 전형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조계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5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부결 과정의 절차적 불투명성을 공개하며 “핵심 사항 누락과 통계 분석의 잘못 적용 등 다수 위법·부당 사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재검토 필요성을 인식하고, 청동소반·청동초두 등 추가 증거를 비교 분석하겠다”고 답변했다.

◆문화재 지정 심의구조의 문제…‘팩트 아닌 주관적 요소 작용’

지금까지 있어온 ‘증도가자 사건’은 단순히 고려 금속활자의 진위 논쟁이 아니다. 이는 학문적 성취, 문화재 제도, 경제·권력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복합적 문제를 드러낸 사례다.

증도가자 사례는 문화재 지정 심의 구조가 전문가 영역과 정치·행정적 판단 사이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당시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 위원 8명 중 서지학(書誌學)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고 한문, 서화, 도자기, 범종 등 각기 다른 분야 전문가로 구성돼 있었다.

증도가자가 7년간 진위 논란 끝에 문화재 지정이 부결되면서 학계 반발이 거세자 문화재위원회는 2017년 9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증도가자 진위 논란’을 가릴 토론회를 개최했다. 주제는 ‘고려 금속활자! 문화재인가? 아닌가?’였으며 증도가자가 진본임을 주장해온 남권희 교수 등 학계 인사와 그해 4월 문화재 지정을 불허한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대거 토론자로 참석했다.

당시 토론자로 참석한 문화재청의 한 실무 책임자는 “증도가자는 출처가 불분명하며 과학적 분석 결과 고려 시대의 금속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고, 서체도 증도가를 인쇄한 글자가 아니다”라고 자신했다.

이에 대해 남 교수 등은 “출토 문화재의 특성상 출처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목판으로 인쇄된 증도가에 있는 글자 크기가 증도가자와 다른 것은 목판활자는 시간이 지나면 위축되거나 뒤틀리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당시 토론회를 계기로 일종의 '음모론'도 고개를 들었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해온 일부 학계 인사들과 문화재위원회, 그리고 남 교수와 의견이 같은 학자들 사이의 이론적 갈등이 객관적 검증에 걸림돌이 됐다는 주장도 그런 음모론 중 하나다. 또한 증도가자의 가장 많은 분량 보유자가 고유물을 거래하는 인물이란 점도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을 부결한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 남 교수와 의견이 같은 학자들은 "2017년 제2차 동산문화재분과 속기록회의록 내용을 보면 일부 위원의 경우 활자 수량, 증도가 인쇄본의 글자 수 등 기초 정보조차 숙지하지 않은 채 심의에 임했다"는 점 등 문화재 지정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적용한 딥러닝 기반 서체분석법에 대해서도 “인장 진위 판별용 알고리즘을 적용한 부적절한 방식”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는 장재완 고려대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위원이 문화재청 회의록(2017년)에서 직접 밝힌 내용이다.

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자신의 논문 ‘문화재 지정의 정치사회학: 증도가자 사례 연구’(2020)에서 “문화재 지정은 단순한 학술 판단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와 상징적 권력이 결합된 영역”이라며 “증도가자 사건은 학문과 권력이 충돌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청량사 건칠불’ 사례로 본 문화재 지정 제도적 허점·검증 과정

증도가자와 유사한 선례가 일명 ‘청량사 건칠불’ 사례다. 지난 2009년 보물 지정 신청 이후 제작 연대를 두고 논란을 빚었던 경북 봉화 청량사 건칠불, 공식 명칭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지정 신청 7년 만에야 보물 제1919호로 지정됐다.

‘건칠불(乾漆佛)’이란 삼베나 종이로 틀을 만든 뒤 반복적으로 옻칠을 해서 만드는 불상이다. 청량사 건칠불은 높이 90㎝, 어깨 너비 54㎝, 무릎 너비 72㎝ 크기이며, 1560년과 1715년에 중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청량사 건칠불은 얼굴이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하고, 20세기에 통용된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근대 작품’이란 주장이 제기돼 왔다. 그러나 불상의 직물을 채취해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직물 제작 시기가 770∼945년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보물 지정으로 청량사 건칠불은 10세기에 제작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과 함께 우리나라 건칠불의 시원이 되는 작품으로 인정받게 됐다.

청량사 사례는 증도가자 논의와 중요한 교훈을 공유한다. 출처와 제작 근거가 명확한 유물이라면 과학적 검증을 통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청량사 건칠불은 제작 연대를 방사성 탄소연대 분석을 통해 확인하면서 국내 학계뿐 아니라 해외 연구자에게도 신뢰를 얻어 문화재 지정으로 이어졌다.

◆남은 과제는…문화재 지정 제도 개선과 국제적 공신력 확보

김종연 한국기록학회장은 “증도가자와 같은 유물의 재검증은 국내 연구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국제 표준 검증 체계를 마련해 분석해야 세계 학계에서 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다”(한국기록학연구 제49집, 2019)고 말했다.

박정혜 교수도 위 논문에서 “국내 논쟁에 머물지 않고 국제 학계와 협력해 증거를 확보하면, 증도가자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남권희 교수는 “증도가자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학술적 증거 확보뿐 아니라, 제도적 개선과 국제적 검증이 필요하다”며 “청량사 사례처럼 검증을 통해 문화재 지정 과정의 신뢰성을 확보하면, 한국은 단순 기록의 발견을 넘어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2025년 국정감사와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재검토 결정은 단순한 학술 논쟁을 넘어, 권력·출처·신뢰가 얽힌 문화재 지정 구조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증도가자는 이제 학문적 논쟁을 넘어서 한국의 기록문화와 문화 주권을 세계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