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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시관

중국 고미술 상설전 II 
관심 작품
  • 15
  • 정문천강채홍매도화형반
  • 청대 | 3.7x17.6x10.5cm
  • 시작일 : 2021-09-27 00:00:00
    종료일 : 2023-12-31 00:00:00
  • 1,960
  • 이체,현금,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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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정보

청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도예가인 정문(程門, 1833~1908)이 1900년에 제작한 홍매도 천강채(淺絳彩) 자기다. 천강채는 청말 민국초에 중국을 대표하는 도자 생산지인 경덕진(景德鎭)에서 섭씨 600~850도의 저온에 구운 자기의 유약 위에 그림을 그려 굽는 유상채(釉上彩) 기법을 말한다. 유상채는 유약을 칠하고 구운 뒤 기물의 표면에 저화도(低火度)에서 녹는 안료로 무늬를 그려 다시 굽는 방법이다. 구연부가 넓고, 굽이 좁으며, 가운데가 동그랗게 뚫려 있는 국화꽃 모양의 백자다. 안쪽에는 가운데가 동그랗게 뚫려 있으며, 그 주위의 표면에는 붉은 꽃이 활짝 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천강채로 그려져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정문이 경자년(1900) 가을에 쓴 강남풍물(江南風物)에 대해 읊은 글이 행서체로 남아 있다. 이렇게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천강채 자기는 북송시대에 등장한 사대부와 문인(文人)들이 즐겨 그리고 완상했던 문인화(文人畵) 전통을 반영한다. 굽의 바닥에는 소장자로 보이는 이름 ’張广發(장광발)‘이 쓰여 있다. 이 천강채 자기를 제작한 정문은 청나라 말기의 성공한 서화가이자 최초의 천강채 화가로서 자(字)가 송생(松生)이며, 설립(雪笠)·입도인(笠道人)·설립도인(雪笠道人) 등의 호를 사용했다. 원나라 및 청나라 초기의 사왕(四王), 즉 왕시민·왕원기·왕감·왕휘의 화풍을 본받아 대담하게 편봉(偏鋒)을 운용하여 문인화의 사의(寫意) 경지에 다다랐다. 그는 홍색이나 청색을 이용하여 인물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온 천지가 푸르른 가운데 한 점의 홍색'과 같은 의경(意境)을 획득하였다. 정문의 천강채 자기는 전문수장가의 주문으로 제작될 만큼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천강채 자기는 청나라 함풍제(1850~1861) 말기인 1855년에 태평군이 경덕진의 어요창(御窯廠)을 불태워 없애버린 뒤 자기에 그림을 그리던 정문 등의 화공들이 공력과 재료가 적게 드는 기법으로 개발한 유상채(釉上彩)의 자기다. 어요창은 1369년 홍무제가 황실용 전용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설치한 황실 도자 공방 이름이며, 유상채는 유약을 발라 소성한 자기의 표면에 유상채 안료로 문양을 그린 뒤 옅은 홍색과 녹색, 옅은 남색 및 자색(紫色) 등으로 선염하여 섭씨 650~700도에서 소성한 일종의 특수한 저온채 유자기를 말한다. 천강(淺絳)은 원나라 때 황공망(黃公望) 등의 문인화가들이 수묵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홍색과 청색을 위주로 점차 옅게 색칠하는 선염법(渲染法)에 따른 중국 전통회화를 가리키는 용어다. 대표적인 천강채 자기의 화가로는 이 천강채 자기를 제작한 정문을 비롯해 왕소유(王少維), 금품경(金品卿), 유자명(兪子明) 등이 있다. 이러한 천강채 자기는 번잡한 문양을 일소하고, 송나라 화원(畵院)의 공치(工致)한 화풍에서 벗어나 원나라의 공령(空靈)하고 담아(淡雅)한 풍격으로 발전시켰다. 중국 전통화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도자기에 표현하여 도자기 그림[瓷畵]을 일신했다. 이와 함께 천강채 자기는 문인 사대부의 사랑을 받으며 광서제(1875~1908) 때 성행했으나, 선통제(1909~1912)와 민국시대(1912~1949) 초기에 급격히 감소해 고온채(高溫彩) 자기로 대체되었다. 천강채 기법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천강채 자기는 채색이 옅어서 보존하기 힘들어 희귀하다. 가장 오래된 천강채 자기는 이 반을 제작한 정문과 그의 아들 정영(程榮)이 1855년에 제작한 <천강채 산수인물화이편호(淺絳彩山水人物花耳扁壺)>(안휘성 이현 문물관리소 소장)인데, 중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천강채 자기의 윗면에 쓰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남의 풍물은 가을과 봄에 붓으로 그린 그림 속에 담겨 있다. 꽃피면 봄비가 마을에 내린 것처럼 달이 곧 조각 그림자를 드리울 때 바람이 움직이려는 까닭은 하나의 작은 흔적 때문이로다. 사람을 만나 진실로 이 어려움에 매달려도 꺾여 휘장으로 들어가니, 다시 번뇌가 일어난다. 꿈속의 넋은 아침이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다. 아주 작은 쌀 한 톨도 없게 되면 부르짖으며 헤아리려 시장 변두리를 향한다. 문에는 신선의 옷을 입은 위인들과 원림에는 언제나 잔치하는 하늘의 권세가 바다를 부순다. 참여하여 스스로 다투기를 구별하고 추위에 서리가 내리는 어려운 날이면 잊었던 나그네들이 흩어져서 실당에 오른다. 경자(1840) 중추(9월) 입도인 정문이 그리고 쓰다."

江南風物在 秋春筆辰 生花初水村似 月付將干片影因風欲動一寡痕逢人 固是難攀折入帳還應惱夢魂 朝 來無粒米 呼量卷向市邊門霓裳 幺鳳 素園林每宴天權碎海參自別爭寒 霜日下難忘客散室堂深 庚子仲秋笠道人程門畵竝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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