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본문 : 石恪字子專益暢人性(석각자자전익창인성)
滑稽以口辯之畵佛(골계이구변지화불)
衜人物始師張南(도인물시사장남)
本後尊畵縱逸不(본후존화종일불)
尙規難蜀平國闕下(상규난촉평국궐하)
嘗被方畵相國寺壁(상피방화상국사벽)
授以畵院之職不就性(수이화원지직불취성)
不覇圖畵之才必以(불패도화지재필이)
諷譏玩無馬牛卷香(풍기완무마우권향)
莊予家下歸國下踃(장여가하귀국하소)
文和所室番予齋頭(문화소실번여재두)
叢日圖題而通之(총일도제이통지)
∎ 해석 : 석각의 자는 자전이니 유창한 인성을 지녔다.
익살스럽게 구변으로 부처를 그렸고
불도 인물의 그림은 처음 장남에게 사사했다.
본래 도교의 그림을 그렸으나 제멋대로
상규를 그렸고 촉나라평국의 임금에서
일찍이 상국사 벽화를 그리고
화원에서 직무를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은 성품으로
도화의 재주를 반드시 아무것도 안 했다.
풍자하여 간하여서 마우가 없는 책의 향기를
장자가의 집으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움직였으니
글월이 실내에서 나의 서재와 화합하여
총일의 그림화제가 그것에 통하였다.
-> 송극이 '석각'의 인품과 사조를 묘사한 글이다. 이 또한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 작가 : 洪武十六年秋 宋克(홍부십육년추 송극)
∎ 낙관 : 宋克(송극)
∎ 참고 :
1. 石恪(석각) : 중국 5대 10국 후촉의 화가. 자는 子專(자전). 성도(쓰촨성) 출신. 유학을 배웠으나 원래 표경하고 즐겨 사람을 야유하였다. 火畫(화화)의 명인 장남본에 사사하여 분방한 일품화풍을 일으켰다. 촉의 寺觀(사관)의 벽화에 佛道(불도)의 도상을 많이 그렸다. 건덕 3년(965) 촉이 망하자 송의 수도를 변경(개봉)으로 옮겨 송태종의 명에 의하여 상국사의 벽화를 제작하였다. 뒤에 궁정으로 부터 화원의 직을 수여 받았으나 사퇴하고 귀향 도중 사망하였다. 戱筆(희필)에 의한 인물화의 ‘다만 얼굴과 수족에는 화법을 쓰고 의관은 거친붓으로 그린다’의 화풍은 模本(모본)의 『이조조심도』에 잘 나타나 있다.
2. 相國寺(상국사) : 중국, 하남성 개봉시내의 사원. 북송시대에 가장 번성하였다. 북제시대(555)에 창건된 건국사적에, 당의 승 혜운이 1장 8척의 미륵불을 본존으로 한 가람을 만들고(706), 예종은 자신의 봉국의 상을 따서 상국사라고 이름 붙였다.
3. 洪武(홍무) : 중국 명나라의 초대 洪武帝(홍무제) 朱元璋(주원장) 때의 연호(1368~1398년).
4. 16년 : 1384년
5. 宋克(송극) : 1327(원 태전 4)년 ~ 1387(원 홍무 20)년 중국 명대 초기의 서화가. 호는 南宮生. 장주(장쑤성) 출신. 원말 동란기에 각지를 주유하고 뜻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홍무년간(1369~1398)초에 일시 동상부동지에 벼슬을 하였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自娛의 생활을 보냈다. 서예는 초∙예서가 출중했으며, 초서는 종요, 왕희지의 풍을 배우고 색정의 법을 겸하였다. 또한 『급취장』을 연구하여 장초를 잘 쓰고, 축윤명에게 칭찬을 받았다. 고개가 저서한 『남궁생진』이 있다. 詩가 훌륭하여 고개 등과 함께 ‘오중 10재사’라 불리우고 서예에서는 송광, 송수와 함께 ‘三宋’ 이라 불리웠다. 또한 묵죽을 득의로 하여 왕말, 양유한, 하창등과 나란히 찬사를 받았다. 서작품으로는 『왕연시권』(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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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부터는 석각 서화에 기록된 한자를 풀이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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