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2022.07.08) 50년간의 수집품 정리하다 韓日병합 주범들 사행시 원본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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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2-07-0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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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고미술품 도록 완간 앞둔 김종춘 前고미술협회장 |
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이 최근 고미술품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일한신협약 기념 시첩’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는 “아픈 상처의 증표이지만, 중요한 사료”라며 “우리 역사의 교훈으로 반드시 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신창섭 기자
작년 ‘한·중 문화유산’展때 체계적 도록 중요성 깨달아
고대 ~ 근세기 유물 총망라 수백쪽 책 10권으로 정리 이런게 있었구나, 나도 놀라
‘증도가자’진위논란 안타까워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확신해 獨대사가 거액에 판매 요청도 가치 인정받도록 최선다할 것
“후회했을 때요? 있었지요. 경영난을 겪거나 다른 이의 모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 길을 걸었을까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유산을 발굴해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금전으로 바꿀 수 없는 보람입니다. 전 세계에서도 드문 문화재들을 매일 접하며 산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지요.” 50년 동안 고미술업에 종사해온 김종춘(74) 다보성갤러리 회장은 특유의 활달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고미술협회장을 일곱 차례나 지냈을 만큼 업계에서 인정받는 권위자다. 그가 지난 세월 수집한 고미술품에 대한 도록을 만들고 있다. 수백여 쪽의 책이 1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달 중으로 완간하는 도록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문화 시기부터 근세기까지의 유물을 총망라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갤러리로 찾아갔을 때, 김종춘 회장은 도록의 마무리 작업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일해온 전문 인력들이 물품을 정리하고, 김광섭 사진작가가 제자들과 함께 촬영 작업을 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젊은이 예닐곱 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 이미지 편집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김 회장이 이들 실무진을 격려하는데, 경쾌한 웃음소리가 연방 새어 나왔다.
“뛰어난 인재들이 열심히 작업하고 있어서 믿음직스럽습니다. 저는 늘 강조합니다. 100프로가 아닌 99프로는 빼야 한다고. 100년 이상 가야 할 도록 작업인데, 단 한 점도 문제가 있으면 안 되니까요.”
수집품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유명하다. 물품마다 거기 서린 역사와 그 문화적 가치를 열띤 목소리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꼭 자식 자랑을 하는 아버지 같다. 김 회장은 전체 수집품을 정리하는 도록 작업을 진행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작년에 갤러리 40주년을 맞아 ‘한·중 문화유산 재발견’전을 했잖습니까. 그때 전시 도록을 만들었는데, 중국 원나라 때 도자기 사진들을 본 분들이 깜짝 놀라며 해외 전시를 권하더군요. 고미술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도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지요.”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추천사를 썼던 작년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보성이 고미술의 보물창고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물품 정리 작업을 하다 보면 이런 게 있었구나, 하며 저도 놀랄 때가 있어요(웃음). 이번에 한일병합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함께 쓴 기념 시를 담은 서첩을 발견한 게 그 사례입니다. 여기 보세요.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을 기념해 신·구통감(新·舊統監)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소네 아라스케(曾니荒助)와 궁내대신(宮內大臣) 모리 타이라이가 각각 춘무공(春畝公), 서호자(西湖子), 괴남(槐南)이라는 이름으로 시 한 줄씩 읊고 한국 수상(首相) 이완용이 한 줄을 보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일한신협약을 획책한 당사자들이 칠언 사행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서울 남산에 있던 경성신사(京城神社)의 탁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 원본을 담은 서첩이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번 서첩은 중국 난징(南京)대학살의 주범인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 관련 유물 속에서 나왔다.
“나카지마에게 한국인들이 전별시를 써 준 것이 함께 발견됐습니다. 한국인의 이름이 한자로 명기돼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지 향후 추가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아픈 상처의 증표이지만, 중요 사료로서 반드시 새겨봐야 할 것들입니다.”
그는 고미술협회장을 지내는 동안 업계 활성화를 위해 뚜렷한 성과들을 냈다. 지난 2003년 헌법재판소에 ‘도난문화재를 무조건 보유자로부터 몰수하도록 한 문화재보호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내 ‘보유 경위를 안 따지고 몰수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얻어낸 것이 한 사례이다. 그는 시장에서 위조품을 몰아내기 위해 임기 내내 ‘가짜와의 전쟁’을 강조했다. 문화재청 후원을 받아 진품과 위조품 구별을 주제로 한 전시를 열고, 협회의 감정 내용을 책자로 펴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업계 최고 전문가들이 강의하는 고미술품 감정 아카데미를 개설해 23기까지 지속했다.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 ‘증도가자’ 59점(위 부분)과 ‘네다리형 고려 금속활자’ 42점. 다보성갤러리 제공
그는 가짜와의 전쟁을 통해 업계 전체의 신뢰를 높였으나 자신은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증도가자(證道歌字)’ 진위 논란에서 음해를 받는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불만을 품은 상인들이 일부 학자와 결탁해 공격해오는 바람에 증도가자 문화재 지정이 무산됐다고 생각한다.
증도가자 논란은 2010년 9월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고려 금속활자들을 공개하며 시작됐다. 국내 대표적 서지학자(書誌學者)인 남 교수는 이 활자가 보물로 지정된 불교 서적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증도가)를 인쇄할 때 사용한 증도가자라고 주장했다. 현존하는 증도가는 금속활자로 인쇄했던 책을 1239년에 목판으로 다시 찍은 번각본이다. 이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서적이 있고, 그것을 찍은 활자가 증도가자라는 것이다.
1239년 이전의 금속활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인정된다면 세계 인쇄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 사건이 될 수 있다. 세계 최초로 일컬어지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1455년 인쇄본)와 청주 흥덕사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년 발행)’보다 앞서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쇄본이 아닌 활자 그 자체가 나온 것이니 문화재계 안팎에서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증도가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7점을 소유하고 있으며 김 회장이 59점을 갖고 있다.
김 회장은 증도가자와 함께 ‘네다리형’으로 불리는 고려시대 활자 42점, 그러니까 총 101점에 대해 국가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다. 네다리형 활자는 인쇄본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금속활자로서 가치가 높다는 한국서지학회 등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저는 활자박물관을 만들 의향은 있었으나 문화재 지정 신청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시 문화재청 정책국장이 저를 두 번이나 찾아와 국가지정 문화재 신청을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2011년 신청을 했던 것인데, 문화재청은 7년여를 끌다가 2017년에 지정을 하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발표했어요. 그 과정에서 ‘문화재 지정을 하면 청장을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등의 외부 협박이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고미술업계의 경쟁의식, 학계의 파벌 다툼, 소장자 간의 시각 차이 등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그로 인해 우리의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는 두툼한 책들을 들춰가며 증도가자의 가치에 대해 역설했다. 그가 방사선탄소연대측정 자료 등을 담아 문화재청에 제출한 ‘고려금속활자 지정조사 분석결과 보고서’(393쪽)뿐만 아니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증도가자 기초학술조사 연구’(주관연구기관:경북대 산학협력단·2014년 220쪽),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의 ‘금속활자 과학적 조사’(2016년 616쪽)가 그 가치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증도가자가 고려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다고 하면서도 문화재 지정 부결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바 있으나, 이제 그 과정에 대한 원망은 접어두려고 합니다. 저의 부덕 탓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미술협회장을 20여 년 장기 집권했으니 반대 세력의 음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반세기 넘게 문화재를 봐 온 제 명예를 걸고 증도가자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문화국가라면, 당국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재검토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그는 증도가자 12점을 처음 공개했던 지난 2010년에 한 독일인이 자신을 찾아와 증도가자를 팔라며 요청했던 것을 되돌아봤다. “최초 공개 후 전시 중이었는데, 세 번이나 찾아와 돈을 얼마든지 주겠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거절했지요. 나중에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그가 주한 독일대사인 것을 알았습니다. 역시 구텐베르크를 배출한 나라로구나, 감탄했지요. 독일에서 증도가자에 대해 그런 관심을 보인 것에 대해 우리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중국에서 우리 증도가자를 두고 송·원나라 때의 활자라는 주장을 했던 것도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0년 넘게 끌어온 논란이 지긋지긋하지만, 증도가자의 가치를 인정받는 일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더라도 진실은 밝혀질 테니까요.”
장재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