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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21, 2021.02.10) 세계최고 금속활자(?)‘증도가자’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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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1-02-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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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6개항 부결논리 합리적인가?…특위구성 등을 통한 재검증 마땅

 

2010년 9월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로부터 시작된 고려시대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진위논쟁은 지난 10여 년 간 고미술·문화재계의 최대이슈였다.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에서 고려금속활자('증도가자') 101점의 보물 지정 안건을 심의·부결하였으나, 남권희 교수 등 ‘증도가자기초학술조사연구팀’ 등의 강력한 반발과 국회학술심포지엄 등으로 재점화되어 국민적 관심을 증폭시켜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관계 자료를 중심으로 증도가자 진위논쟁의 내막과 실체 등을 분석·게재한다. 

 


본말(진위)을 넘어 감정까지 뒤엉킨 엉망진창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


 

본지가 지난 1월 20일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사명감으로 “세계최고 금속활자(?) ‘증도가자’ 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란 기획기사를 시작하면서, 지난 제3편(2월3일)에서 1239년 전 이미 수천 자 금속활자 존재는 객관적 사실이며, 추정이 사실을 뒤엎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면서 관계당국(문화재청)은 (지정부결)심의 속기록을 공개하고, 공개토론을 통해 진실규명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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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7년여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관계당국이 2017년 4월 13일 본건 고려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에 대해 ‘고려시대 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 (문화재)가치가 없다’는 (지정)부결 결정은 증거법칙을 넘어선 ‘비약적 상상’으로서 (일반적)상식을 넘어선 납득할 수 없는 논리라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2010년 9월 1일 남권희 교수의 ‘증도가자’ 주장에서 시작된 본건 고려금속활자의 진위논쟁 등에 관한 기사는 1,300여회 이상 넘쳐흐르고 있으며, 지정 부결 결정 후 국회의 질타 등으로 도리어 끊어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논쟁의 전 과정에서 일련의 뚜렷한 흐름이 보이고 있는 바, 그 흐름의 전반적 특징은 1)본건 금속활자 소장자가 상인(김종춘)이란 이유로 어떻게든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으려 하는 듯한 문화재청의 소극적 자세와, 2) 고려시대 탄소연대 및 과학감정 결과(위조 없음)와 관계없이 해외유출 방지에 고심하면서 (부결)지정을 결정(유도)해 나가는 석연치 않는 흔적(담합?) 들이다. 이는 향후 국정조사 및 특검을 통해서라도 엄정히 밝혀져야 할 중대 사안이다. 이에 본지가 역사적 진실규명에 나선 것이다.

 

본건은 세계의 활자문자 역사를 새롭게 정립할 수도 있는 정말 중대한 문제다. ‘상인이 소장하고 있으니, 가치 없다’면서 진위와 관계없이 함부로 내팽겨 칠 수 있는 사안(지정부결)은 절대 아니다. 우선 1239년 번각본으로 발간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발문에 주자본을 목판으로 번각하였다는 내용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2003년도에 낱낱이 조사한 바와 같이(‘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 이에 사용된 글자 수는 1회 사용 628종, 2회 이상 사용 966종 8717자이다. 도합 1954종 9344자이다. 이는 고려 (금속)활자 최소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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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려금속활자의 진위를 논하기 전 살펴보아야 할 점은 언제부터 금속활자가 존재하였나는 점이다. 먹과 종이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은 각종 기록으로 증명되고 있으며, (목)활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활발하였다는 점 또한 각종 문헌(사료)등으로부터 증명된 상황이다. 금속활자의 기원에 대해선 정확하게는 알 길이 없으나 1)문종(1047-1083) 기원설, 2)숙종 7년(1102) 기원설, 3)12세기 중엽 기원설, 4)고종 19(1232)년 기원설 등으로 엇갈리고 있으나, 적어도 고종19년(1232)에는 금속활자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며, 이의 증명자료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상정고금예문’, ‘동국이상국집’, ‘자비도량참법집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 등이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사료)에 의하여 살펴보면, “공인을 모아 주자본을 다시 새겨(목판본) 길이 전하고자 한다”는 당시(1239년) 진양공 최 이(최 우에서 개명)의 발문에 비추어, 그전(1239년) 이미 9344자(남명천화상송증도가 총 활자)의 금속활자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넉넉히 인정된다. 또한 고종 28(1241)년에 간행된 동국이상국집에도 ‘상정고금예문(전50권)’을 금속활자로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234년‘고종 21년’에서 1241년 사이에 최 우(이)가 이 책을 기초로 금속활자로 28부를 찍어내어 여러 관청들에 나누어주었다는 기록 존재). 사실이 그렇다면 1234년 전 이미 상정고금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을 찍어내기 위한 금속활자가 존재하였으며, 전50권에 이르는 상정고금예문에 비춰보면 당시 이미 십여 만자 이상의 금속활자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능히 추정된다.

 

어쨌든 2010년 다보성 소장 금속활자 101개의 존재가 알려지자마자 격렬한 진위논쟁을 일으켰고, 2017년 4월 문화재청이 ‘(보물)가치 없다’고 발표했으나, 도리어 부결(논리)에 대한 반박을 넘어 부결을 위한 담합의혹(속기록)을 제기하는 등, 본말(진위)을 넘어 감정까지 뒤엉킨 엉망진창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문화재청 6개항 부결논리 합리적인가?…특위구성 등을 통한 재검증 마땅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진위논쟁에 있어1)금속활자 소장자가 상인(김종춘)이란 이유로 어떻게든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으려하는 듯한 문화재청의 소극(비토)적 자세와, 2)고려시대 탄소연대 및 과학감정 결과(위조 없음)와 관계없이 해외유출방지 고심 및 (부결)지정을 결정(유도)해 나가는 듯한 석연치 않는 흔적(담합? 관련자료)들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속기록 공개 등을 통해 전말이 밝혀져야 한다. 머뭇거려서는 아니 된다.

 

관계당국(문화재청)은 본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의 문화재(보물) 지정에 대해 검증·재검증 등을 거듭하다, 지정 신청 후 6년이 지난 2017년 4월 13일 1)탄소연대(수용여부?), 2)과학감정(12가지 과학방법을 위조여부?), 3)서체분석(국립과학수사연구원), 4)주조 재현 실험, 5)조판실험, 6)출처조사 등을 거친 결과 보물 신청된 ‘증도가자’에 대해 보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아 보물로 지정할 수 없다고 의결하였다. 부결 사유로 “첫째, 증도가자로 지정 신청된 활자는 서체비교, 주조 및 조판 등 과학적 조사 결과 ‘증도가’를 인쇄한 활자로 보기 어렵다. 둘째, 신청활자의 중요성에 비추어 고려금속활자의 여부에 관해서도 검토한 결과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비롯한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고려 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출처와 소장경위가 불분명하고 금속활자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청동수반‧초두와의 비교조사가 불가능하여 고려금속활자로 판단하기도 어렵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에 기초조사연구팀 및 소장자가 (강력)반발하였고, 이후 국회로 번져 격론을 벌였으며, 민주당 정세균 의원은 "2017년 증도가자 보물 심의 부결 과정에 부족한 부분이 있고,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며 "당시 문화재위원회 속기록을 보면 증도가자의 해외 유출을 걱정하는 의견과 고려시대 금속활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지적)하면서, “...금속·서예·조판(組版, 판에 활자를 맞춰서 짜 넣는 작업)·주조분야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심의 과정과 문화재 가치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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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건 고려금속 활자(일명 ‘증도가자’)는 세계 활자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는 중대사안으로서, “고려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보물가치 없다?’는 식으로 역사에 묻힐 사안은 절대 아니다. 철저한 재검증(실험)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본지는 향후(제5편)부터 고려금속활자의 진위논쟁과 관련, 문화재청의 6개항 부결논리가 합리적이며, 모순점이나 미흡한 점은 없는지 등에 대해 각종 자료 및 관계 전문가 등의 실험(자료)을 통해 철저히 검증해 나갈 것이다. 이에 앞서 우선 문화재청의 6개항 부결논리의 합리성 등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본다.

 

먼저(1), 관계당국은 “기존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3개 기관에서 실시했던 신청 활자에서 채취한 먹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은 적정하게 진행된 것으로 인정되며, 그 시대는 상한 11세기 초, 하한 13세기 초, 중간 값 12세기 초로 나타났다. 다만, 신청 활자의 출토 당시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의문이 있고, 그 이후 보존환경의 신뢰성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먹의 연대측정 결과로 활자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라고 설시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의문이 있고, 그 이후 보존환경의 신뢰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라고 함은 먹의 오염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건 금속활자에서 연대측정을 위해 채취 한 먹은 표면의 부식물(흙 등)을 털어내고 속에 있는 먹을 채취하였기에 오염가능성은 희박하다. 채취과정 등은 기록되어있을 것이다. 지정조사단의 김명진 (주)네오시스코리아 방사선 연구소장 조차 시료선별, 시료채취, AMS 측정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문화재청 또한 연대측정과 분석기관의 신뢰성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적인 연대의 해석은 연대측정 결과만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되며, 다양한 과학적 증거 및 인문학적 해석을 종합하여 수행돼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판단하자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다음으로(2), 위조·가공 흔적 등을 밝혀내는 과학 감정과 관련하여 관계당국은 “  신청 활자의 표면층, 부식생성물 및 내부 금속의 주성분, 미량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동유물에서 나타나는 데이터와 다르지 않았으며, 활자의 내부구조 및 표면조사에서도 특이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설시했다. 즉, 위조나 가공 흔적 등이 없었다는 뜻이다. 과학감정을 위해 12가지의 방법 등이 동원되었다.

 

과학감정은 진위판별의 절대적인 기준이다. 이러한 결과에도 애써 이를 무시한 듯하다. 과학감정에 앞서 2015년 10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활자 7점은 모두 표면과 내부의 성분이 상이하게 관찰되기 때문에 위조의 가능성이 높은 활자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대서특필되어 위조활자가 기정사실화 되는 듯했다. 그러나 과학감정의 결과는 이를 모두 부정했다. 검증과정 중에 도대체 왜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말 아이러니하다.

 

세 번째 서체분석 등과 관련하여 관계당국은, “서체를 분석한 결과, 신청 활자와 신청 활자로 찍었다는 주자본을 번각한 증도가 서책의 글자와의 유사도 분석에서, 글자의 모양, 각도, 획의 굵기 등에서 대조집단인 임진자 활자 복각본에 비해 평균 유사도는 낮고, 유사도 편차의 범위가 큰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일관된 경향성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다만, 증도가 서책의 동일 글자일지라도 번각 과정에서의 변수를 고려할 때 활자-글자의 유사도 분석 결과만으로 신청 활자가 증도가를 찍는 데 사용된 활자인지 단정하기 어려웠다”고 설시했다.

 

서지학자 남권희 교수는 2010년 9월 1일 본건 고려활자(일명 ‘증도가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면서 활자 12개가 ‘증도가’를 인쇄한 활자와 유사(일치)하다고 주장했고,  연이어 동국이상국집의 서체도 증도가자와 유사함을 주장하면서 학계의 활발한 연구(검증)를 요청했다. 이는 2003년의 9344자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서체 유사도 분석 및 동국이상국집의 서체 분석 결과 등에 따른 주장이다. 그렇다면 우선 9344자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서체 유사도 분석 및 동국이상국집의 서체 분석 등을 진행했어야 했다. 더욱 세계 최고를 다투는 문제이기에…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번각본 제작을 위해 11명의 당대 각수(刻手)들이 동원되었다(기록 현존). 또한 당대 각수(刻手)들이 각인한 글자들도 같은 글자이지만 각수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활자본과 번각된 목판본의 글자 역시 미세한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솔직히 국과수의 (서체)분석은 위조 서체에 분석에 응용되어질 방법으로서 이건과 같이 표준(기준)모델 없는 사안에 적용되어지기에는 부적절하다. 더욱이 500년 후의 임진자 활자와 본건 활자를 비교분석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며, 세계최고 금속활자를 다투는 중대한 사안에 왜 동국이상국집의 서체 유사도를 분석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향후 재검증 과정에 이의 철저한 분석(검증) 등이 절실하다.

 

다음으로(4) 주조방법 등과 관련하여 관계당국은, “주조 재현 실험 결과, 활자 제작과정에서 제거해야 하는 목형을 빼내기 어려운 활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밀랍주조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단된다. 또한, 글자면과 바탕면을 분할한 목형을 만들어 활자를 주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설시했다.

 

이에 대해 기초학술조사팀은 관계당국의 결론(주조방법)은 무지와 오류의 결과(소치)라고 반박하면서 조선 세종조의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주조방법(주물사 주조법) 등이 이미 기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물사주법(사창주조법) 공법으로 목형을  빼내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상·하틀’을 분리하는 과정에 글자(틀)는 자연스럽게 분리되며 접합부문의 너덜이 같은 것을 쇠줄로 깎아내고 다듬었다(연마 흔)는 것이다. 더하여 이의(주조방법)의 공개토론(실험)을 강력 요청하였으나 외면하였다고 강력 성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주조방법에 대한 토론 및 실험은 필수 상황이다.

 

다섯 번째로 조판실험 등과 관련하여 관계당국은, “조판실험 결과, 신청 활자 중 홈형 활자의 경우 세로 평균치보다 그 크기가 작은 활자가 1자 이상 포함된 경우에는 조판이 가능했으나, 평균 크기 또는 최대 크기의 활자는 조판이 불가능하였다. 홈날개형 활자의 경우 가장 작은 크기의 활자로는 조판이 가능했으나, 평균 크기 또는 최대 크기의 활자로는 조판이 불가능하였다. 홈형과 홈날개형의 혼합조판에서는 1행 15자로 되어 있는 증도가 서책과 달리, 1행에 14자만이 들어갔으며 증도가 서책에 비해 좌우 열이 균일하지 않았다”고 설시했다.

 

이에 대해 기초학술조사팀은 “활자본과 번각본의 광각(인쇄된 책자의 먹선 테두리)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번각본은 목활자의 수축(통상5〜8%정도)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고, 조선조에 간행된 수많은 고문헌(서적)들의 광각들을 살펴보아도 제각각 다르다. 최소한 이런 기본적 사실들에 대한 고찰조차 없이 활자본과 번각(목)본의 광곽(크기)자체가 같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조판실험을 한 관계당국의 주장은 사실오인(事實誤認)에 불과하다. 활자본과 번각본의 크기는 미세할 정도지만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목판‘번각본’ 수축), 이에 따라 활자본 제작이후 상당기간 경과한 후 각수들에 의해 제작된 번각본의 광각자체의 크기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점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마치 짜깁기를 한 듯한 조판실험은 받아들일 수 없다. 향후 수많은 증거자료(각종문헌)를 제시하여 이를 밝힐 것이다”라면서, 공개토론 등을 통한 조판의 가변성 입증을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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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6)으로 관계당국은,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고려 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출처와 소장경위가 불분명하…”란 이유를 설시, (지정)부결을 의결했다. 어찌 보면 지정부결의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소장자(다보성갤러리 김종춘 회장)가 강력 반발하였음은 물론이다. 실제 관계 자료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소장경위를 문제 삼아 부결담합의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출처와 소장 경위에 대한 말 번복 등을 부결사유로 제시하면서, ‘소유자, 진술번복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문화재 지정 영원히 불가능’, ‘신청자에게로 부결의 책임을 전가하여 對국민 비난가능성 감소 가능’까지 논의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국외반출’에 전전긍긍하면서도 말이다. 다다에서 출발한 소장경위 등은 관계당국에서 이미 수차 조사한 것이 아닌가? 800년 전의 일을 어느 누가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개괄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의 (보물)지정부결을 결정한 문화재청의 6개항의 부결논리는 솔직히 납득되지 않는다. 위조의 흔적이 있었다면 101점 전수 조사 및 파괴감정까지 진행한 1년에 걸친 각종 과학감정 (진행)기간 동안 어떻게든 밝혀졌을 것이란 점은 명백한 사실 아닌가? 이런 객관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오히려 드러나는 자료들에 비춰보면 ‘문화재청이 부결 쪽으로 몰고 가지 않았나?’하는 의구심만 증폭되는 상황이다. 특히, 결론을 쉽사리 낼 수 없으니 ‘지정보류’를 권고(지정조사단)하였으나, 문화재청이 부결로 뒤집어 엎었다는 관계자발 수많은 언론보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더하여 상당수 문화재위원들의 임기가 종료(2017. 4. 30)됨으로 결자해지 차원에서 (부결)결정하였다는 언론보도의 의미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세계최고의 (고려)금속활자일 가능성이 상존함에도 상인(다보성갤러리 김종춘)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재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문화재위원의 역사적 사명인지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이런 혼조상황으로 인해  문화재청의 부결결정(2017. 4. 13)이 지지를 받기는커녕 당사자(소장자, 기초학술조사단)들의 반발을 넘어 국회로 비화되어, ‘고려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문화재 가치가 없다’는 황당(?)한 논리가 질타를 받으면서 “제3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 도출에 노력해 줄 것”과, “…금속·서예·조판(組版, 판에 활자를 맞춰서 짜 넣는 작업)·주조분야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심의하면서 문화재 가치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질책 받기에 이른 것이다.

 

본건은 (세계)활자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정말 중요한 사안이다. 이같이 중요사안에 대해 증거 등이 뒷받침되지 않는 추정 등으로 함부로 결론 낼 일은 절대 아니다. 속기록은 속히 공개되어야 하고, (검증)특위를 구성하여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는 (문화)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이다. 이에 본지는 지속적으로 증도가자 진위논쟁을 진행(게재)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나갈 것이다.  (계속)